본문 바로가기
인물이야기

조선 최고의 여류 천재 탤런트 황진이

by bookstory 2011. 8. 20.

우리에게 황진이는 멋진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며, 춤 잘추고 남자를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조선의 기생으로 각인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황진이는 그보다 더 슬프고 뜻을 가진 여류 탤런트이다.

황진이에 대한 일화는 허균에 의해 몇몇 기록들이 남아있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제자였다. 그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아버지 허엽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황진이는 어릴적 기록이 전혀 남겨지지 않았다.
황진이는 맹녀의 딸이라는 것이 전해진다. 황진이 어머니는 눈먼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거문고를 잘 다루는 사람이라는 "진현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황진이의 악기 다루는 솜씨는 바로 어머니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황진이 열대여섯에 옆집 서생이 그녀를 연모하다 상사병에 걸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상사병에 걸린 서생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을 지날때 꿈쩍도 안하였는데, 황진이의 저고리를 덮어주자 상여가 움직였다는 일화가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일화는 서울의 한 벼슬아치의 이야기 이다.
그 벼슬아치는 친구들에게
황진이와 오직 30일만 동거하겠다고 하면서 만약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고 호언했었다고 한다.

여기에 30일이 지나 떠나려는 벼슬아치에게 이런 시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달빛 어린 뜨락에 오동잎 다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 노랗게 피었네
누각이 높아 하늘이 한 척이고
사람이 취해 술이 천 잔이라
흐르는 물 거문고 가락에 맞춰 서늘하고
매화는 피리소리에 들어 향기롭구나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지고 나면
그리운 정 푸른 물결인 양 길게 뻗치리라
<임방:수촌만록>

이 시를 들은 벼슬아치는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여러 날을 더 머물렀다고 한다.

조선의 기생은 관기라 하여 백정, 장인, 승려와 함께 가장 낮은 신분에 속해 있었다. 그러하니 당연 국가의 소유물일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고을의 수령이나 외부의 벼슬아치의 방문이 있다면 가무와 함께 그들과 함께 몸을 섞어야 하는 처지다.
보통은 수령의 수발을 들고 그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주 업무라 할 수 잇다.

황진이는 이런 한낫 서생이나 벼슬아치 뿐만 아니라 그 소문은 전국의 양반들에게 알려진 터라 그를 찾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황진이는 그들을 농락하고 사랑아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양반 사내들을 보고 마음속으로 조롱하고 비웃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천한 삶을 살아가는 낙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여성이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뭇 남성들에게 이골이나 있었을 테고, 권태감과 염쯩이 나는 것은 당연할 일일 것이다.

그녀가 찾아간 사람이 도인 지족선사였으나 그 역시도 황진이의 아름다움과 매력에 명성을 포기하게 된다. 그녀는 다시 송악산에 기거한다는 조선의 사상가인 서경덕을 찾아가 제자가 되기를 스스로 청한다. 서경덕은 철저히 속세를 외면하고 은둔생활로 자신의 철학인 기일원론을 확립한 사람이다. 많은 제자들로 부터 신망을 얻는 것은 물론 청렴한 생활로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도인의 경지까지 올랐다고 한다.

황진이는 서경덕과 한방 한이불에 자면서도 손한번 잡지 않았다고 한다. 황진이는 그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점차 그의 사상을 따르게 되어 진정한 구원의 남자로 그리고 제자로서 위치하게 된다. 자신의 처지에 괴로워하는 한 여인의 진정한 구원자요 남성이 서경덕인 것이다. 이에 허균은 서경덕을 진정한 성인이라 칭했다.<성옹지소록>

황진이는 스승 서경덕이 죽은 뒤 전국을 돌아다니며 스승의 발자취를 밟았다고 한다. 금강산, 묘향산, 속리산, 지리산 등을 돌아다니며 서경덕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을 두루다니며 사후 호흡까지 함께 하려 했다. 그녀는 지팡이와 짚신으로 전국을 다녔다. 이 때 한 서생을 꼬셔 짐꾼으로 쓰고, 배가 고프면 절에서 구걸하거나 몸을 팔아 먹을 것을 얻었다고 한다.

그녀는 도인이 되어 세상에 한을 접고 떠났다고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