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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지4

[지리지3] 일제강점기의 시‧군지의 의미 일제강점기에 한반도를 대상으로 작성된 향토지들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 정권을 지원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일제의 식민지가 된 우리나라는 근대적인 지방사 연구 및 편찬 분야에서도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자료 제공이라는 목적에 의해서 시‧군지 편찬이 이루어진다. 일제의 식민 통치를 위한 기초조사사업은 그 기관별로 볼 때 중추원과 총독부 각 기관의 조사, 경성제국대학 연구팀과 그 밖의 지방행정 구역 단위 및 개인적 조사로 구분된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각종 제도와 관습에 관한 문화조사에 나서는 한편 현실 생활에 관한 조사에도 착수하였다. 즉 지역별 산업실태, 촌락구조, 각종 결사, 소작관습과 기타 민속에 관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전의 읍지와는 체제가 다른 근대적인 .. 2008. 12. 23.
[지리지2] 지리지의 유형 지리지는 편찬주체와 지역범위에 따라 두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관찬지리지와 사찬지리지로 구분할 수 있다. 관찬지리지는 국가기관에서 편찬한 지리지로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이 있고 또 하나인 사찬지리지는 보통 지방의 유생이나 유지들이 개인적인 관심으로 편찬한 지리지이다. 사찬지리지는 16~7세기에 다양한 읍지가 편찬되었다. 사찬지리지는 『문소지, 『제주풍토록』, 『연안부지』, 『함주지』, 『해주읍지』, 『송도지』 등이 있다. 16~7세기에 제작된 사찬읍지는 지방 유지들과 같이 관찬읍지를 만들어 그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전국규모의 사찬지리지로는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이 있다. 지리지는 지역 범위에 따라 전국지리지와 지방지리지로 구분할 수 있는.. 2008. 12. 23.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은 1776년 설치된 왕의 도서관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곳에서 글을 닦고 시를 읊었다. 정치인들을 배출하는 곳이기도 하였고, 같이 수학하던 친구를 배신하고 정권의 머리에 오르기도 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세운 이유는 개혁이라는 기치 아래 자신과 함께할 학문을 기반으로 한 왕권을 곤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뒤늦게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애를 벗어던지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룩하기에 이른다. 규장각의 유생과 함께 정조를 위협하는 세력을 정비하였다. '성왕론'을 정당화 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개혁정치를 핀다. 규장각은 그의 이념을 함축해 놓은 것이다. 세조때 이미 양성지가 규장각 설립을 주장하였으나 그 뜻을 펴지 못했다. 정조때에 와서야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2층 누각.. 2008. 12. 19.
[지리지1]지리지의 정의와 역사 지지(地志) 또는 지지(地誌)라고도 불리는 지리지(地理誌)는 일정한 지역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기록이다. 지리지는 자연지리적인 내용뿐 아니라, 역사‧문화‧사회‧경제‧정치‧행정‧군사 등과 같은 인문지리 내용까지 풍부하게 담고 있어, 지리지가 담고 있는 시대와 지역의 모습을 이해하려는 연구자에게 최적, 최다의 정보를 제공한다. 조선시대까지 간행된 지리지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약 1,000 종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지리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만들어졌다.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어떤지역의 자연조건과 그 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기술하는 저술이 꾸준히 이루어졌으며, 동양에서도 중국을 중심으로, 행정과 군사, 재정 등의 측면에서 통치자에게 지리적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지리지가.. 2008.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