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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

by bookstory 2011. 9. 19.
중부 독일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바흐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탓에 어려서부터 개신교의 경건하고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고, 이것은 그의 음악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0살쯤 되던 무렵에 바흐는 부모님을 모두 잃게 된다. 한 순간에 고아가 되어버린 그의 형제들은 친척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바흐는 큰 형인 요한 크리스토프에게 맡겨졌다. 당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고 있던 그의 형은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파헬벨의 제자였다. 형에게 음악 수업을 받게 된 바흐는 자연히 파헬벨의 음악양식을 배울 수 있었다. 특별히 바흐는 악보를 옮겨 적는 방식으로 음악공부를 했는데, 이를 통해 수많은 대가들의 작품을 습득할 수 있었으며, 대가들의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바흐의 창작시기는 그가 일하던 곳의 이름을 따서 크게 바이마르 시대, 괴텐 시대, 라이프치히 시대 셋으로 구분한다. 바이마르에서의 음악생활은 직업 음악가로서의 바흐에게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이 된다. 당시 23살이었던 바흐는 바이마르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로서 영주였던 빌헬름 에른스트의 총애를 받으며 명성과 더 많은 보수를 얻었고, 음악활동에도 중요한 결실을 맺게 된다. 그의 오르간 작품들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곡들이 대부분 이 때에 작곡되어졌던 것이다. 또 바흐는 이 시기에 이탈리아 음악에 관심을 가져 비발디나 코렐리 같은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건반악기용으로 편곡하면서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화성감과 주제를 다루는 기술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아 음악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무엇보다 이전에 습득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음악들 외에 이탈리아 음악의 특징을 더해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괴텐은 바이마르에 비해 음악을 중시하지 않은 도시였지만 그곳 궁정악장에 바흐가 임명되면서 새로운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아닌 궁정의 악장이었기 때문에 이전처럼 교회음악을 의무적으로 작곡해야할 일은 없었다.

때문에 이 시절 바흐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세속 작품이었고, 기악곡들이 많은 수를 차지했다. 그런 이유 가운데 하나로 영주였던 레오폴드 공작의 영향도 있었다. 공작은 음악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고, 자신의 악단과 같이 연주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바흐는 기악곡을 많이 쓰게 된 것이다. 오늘날 바흐의 작품들 가운데 기억되는 중요한 기악곡들은 대부분 괴텐 시절에 작곡되었다.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비롯해, 무반주 첼로 모음곡, 관현악 모음곡, 브란덴브르크 협주곡, 3개의 바이올린 협주곡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이벤션, 영국 모음곡, 프랑스 모음곡 등, 이 외에도 많은 기악곡들이 작곡되었지만 상당수가 유실되고 현재는 이런 작품들만이 전해지고 있다.

바흐는 생애의  마지막 27년간을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교회음악책임자로 일했다. 매주일 성 토마스 교회에서 연주할 칸타타와 코랄 전주곡들을 작곡하는 것 외에도 라이프치히 시의 여러 교회에서 사용딜 음악을 작곡했고, 시의 공식 행사에 쓰일음악과 교회 부속학교와 대학의 음악활동에도 관여헀다. 그의 칸타타 가운데 60%가 이때에 만들어진 것이며, 대부분의 교회음악도 이때 만들어졌다. '인류의 기쁜 소망이 되신 예수' 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이 곡도 이때 만들어진 바흐의 칸타타에 나오는 곡이다.

"바흐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바흐의 음악은 다른 사람들의 음악과 구별되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는 것과 바흐의 위대성은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다는 뜻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리 높이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뒤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기도 했다. 그러다 19세기 초 낭만주의 시대에 멘델스존이 바흐의 작품들을 연주하면서 다시 ㅅ람들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 그가 말년에 헌신을 다한 라이프치히에서조차 그의 사후에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나 기념물을 세우지 않았었다. 다행히 멘델스존에 의해 바흐 부활운동
이 일어난 뒤 많은 기념비가 세워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바흐는 이때부터 음악의 역사에서 확고부동한 대음악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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