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는 중국 진나라가 채택하여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한 통치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한비의 법가 이론은 춘추전국 시대 여러 제자백가 중 가장 현실적인 통치 이념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서양의 통치학의 교과서인 마키아 벨리의 군주론(1532년 간)과 비교하는 이들도 있다. 허나 이는 다른 이야기 이다. 동양에서는 이미 이보다 1500년이나 앞선 시대에 이런 통치학에 대한 기본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15세기에 씌어진 훨씬 뒤의 저술 이다. (한비 : 기원전 280~?)
한비는 전국시대 7웅중 하나인 한나라에서 태어난 명문귀족 출신이었다. 허나 그는 말더듬이라는 선천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학문을 갈고 닦아 탁월한 문장력과 박학한 지식을 쌓는데 열중하였다. 그는 동문수학한 이사와 함께 순자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사는 한비에게 항상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훗날 이사는 진나라의 제상이 되어 한비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비가 살고 있는 한韓나라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쌓여 있는데다 왕의 실속 없는 소인배 등용, 엉뚱한 인재에게 포상을 하는 등 현재 통치체제의 많은 문제점을 군주에게 건의바 있다. 그러나 왕은 한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비는 이를 원통히 여겨 한비자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국시대를 통일하기 전 진나라 시황제는 "자신이 한비를 만나게 되면 여한이 없겠다"는 소원까지 빌었다고 한다. 결국 진시황은 이 책의 저자 한비자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동문수학한 친구 이사의 모함으로 한비는 옥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게 된다. 결국 난언과 세난 등 왕과 신하의 건의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써놨지만 그 조차도 친구의 음해로 인한 죽음을 피해가지 못했다.
진시황은 훗 날 한비를 죽인것에 대해 후회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진시황은 한비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천하를 제폐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을 건국하였다.
한비 이전에 이런 법가사상을 정립한 이론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한비 역시 과거의 법, 술, 세에 바탕은 두고 있다. 상앙(법), 신불해(술), 신도(세)의 이론을 통합하여 정립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법은 개인이 아닌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원칙이며, 술은 신하가 처세에 대한 원칙이며, 세는 국가 최고 권력자의 권익을 위한 인사정책 이론이 근저에 포함되어 있다.
한비는 이 세 이론을 두루 포용하여 발전시킨 사상이다. 한비는 현명한 군주가 제도를 시행할 때는 공평하게 원칙을 지키고 인물을 가려 뽑을 때는 귀신같이 밝았으므로 그를 비난하거나 곤경에 빠뜨리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권세를 이용해 법을 엄하게 시행해도 군주의 뜻을 거스르는 백성이 없었다.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갖춰진 뒤에야 비로소 법을 시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누락된다면 제대로 된 통치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다시말 해 한비 이론의 근간은 "신상필벌"을 기저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역사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통치체제도 이에 부응하여 변화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명한 "수주대토 (守株待兎)"의 고사성어를 만들어 비유하였다.
주) 수주대토 : 송나라의 한 농부의 이야기. 밭 가운데 나무 구루터기에 달려가던 토끼가 들이받아 목이 부러져 죽자 농부는 토끼를 얻기 위해 구루터기를 계속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는 토끼를 얻지 못했고, 그를 본 송나라 사람들은 비웃음 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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