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전 우리나라는 조선이라는 500년의 역사를 짊어지고 살았다. 과거제도로 학자들이 선발되고 성균관, 집현전, 규장각을 통해 인재가 배출되었다. 이들은 서로 파벌을 형성하고 집단화로 인해 조선은 그렇게 성장하고 아파했다.
그 속을 파해쳐 보면 때론 방관하고 때론 주도하며 업치락 뒤치락을 반복했다. 그 와중에 조선 선비들은 나름의 가정을 아끼고 사랑하며 지켜나갔다. 자신의 오만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초야에 뭍혀 문사만을 하며 살아간 선비도 허다하다. 붕쟁으로 피바람을 일으키기를 서슴치 않았던 조선시대.
조선의 선비이며 아버지이기도 한 그들은 자식앞에선 초연함과 의젓함을 잃지 않고 채찍과 사랑으로 편지를 건냈다. 이 책은 파벌을 초월한 자식사랑이 면면이 흐르고 있다.
편지 속은 자식의 무례함을 나무라고 면박을 주기도 하며 며느리의 산후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도 상상할 수 있다. 현 시대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식의 자식이(손자) 또 왜 이리 궁금하고 보고 싶은지. 잠을 청한 노부(老父)의 미소는 손자 상상에 기꺼워 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어서 일께다. 그 풋풋한 모습을 현대에도 우리 아버지를 통해 이미 곁눈질로 보아왔다.
근엄한 조선의 왕 또한 세자들의 재롱에 어찌 흥겹고 즐겁지 않았을까? 채면불사하고 그들도 손주 재롱에 난국의 시름을 잊었으리라.
정민교수는 조선왕조 8대 성종에서 26대 고종까지 곧은 선비 10명의 편지를 가려 뽑았다. 역사를 바라보는 그의 성정과 인물에 대한 집착을 살짝 훔쳐 볼 수 있다. 편지 속 글들은 여러운 현실 속 우리 아버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페이지가 두꺼워 질까 책 값을 조정해야 하는 경제적 논리 때문에 더 많은 편지 글을 싣지 못함에 은근이 짜증도 난다.
<아버지의 편지>는 시대순의 인물로 순서를 정하였다. 인물에 대한 약력과 함께 편지 한통을 한꼭지로 구성하였다. 본 내용은 번역문과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인물 설명과 서신내용을 흐르듯 써본다.
퇴계 이황은 율곡 이이와 함께 당대에 쌍벽을 이루며 유학의 큰 줄기를 이끈 사람들이다. 그들로부터 수학한 수 많은 제자들은 비방과 헐뜯음으로 서로 참수하고 참수당하는 당쟁에 대해 이미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그들 자신은 원하지 않았겠지만.
아버지로 돌아온 이황의 편지 속에는 단령(옷깃이 둥근 관복)을 받은 기쁨, 아들이 함부로 타인에게 행하는 몸가짐을 실랄하게 꾸짓는 모습은 엄한 아버지의 품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죽기 전 자식이 보낸 소용있는 물건을 꾸짓어 내치는 모습은 고마움과 함께 자식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재미있다. 퇴계 이황은 자식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 흡족했을 것이고 꾸짓음을 당한 아들 준 또한 아버지의 흐뭇함을 이미 느끼고 느꼈으리라.
옥봉 백광훈은 시인이자 문인이다. 요즘의 전업작가와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시 3대 시송으로 불리기는 하였으나 배골고 사는 것은 매한가지 인 듯 하다. 자식의 처신에 대해 몹시 걱정하였다. 둘째 진남은 이이로부터 무척 이쁨을 받았다고 하니 행실이 단정하고 학업에 충실했던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백광훈의 편지에는 행실과 언사, 학업에 대한 꾸짓음이 범벅이 되어 있다. 그도 아버지인지라 자식에 대한 주위의 칭찬을 듣거나 공부하는 끼를 발견하면 기뻐하는 마음을 서신에 잔잔히 표현하기도 하였다. 공부방법을 하나 하나 세심하게 편지로 가르치는 아버지의 성품을 느낄 수 있는 편지들이 돋보인다.
서애 유성룡이 지은 [서애집]의 7편을 뽑았다. 유성용은 인진왜란의 중심에 선 선비로 이황의 문하에 있었다. 그에 대한 재미있는 정보로는 이순신과 가까운 친구라는 점이다. 모든 아들에게 글쓰기에 대해 꾸짓고 가르치는 것이 꼭 현대의 선생님과 제자 사이 같다. 아들을 산사에 보내 학업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하며 사서오경에 대해 공부하는 법을 가르친다. 다른 이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속으로 기특하게 여겼으나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오히려 꾸짓는다. 향교에 가서 움츠러들지 말고 벗들과 잘 지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유성룡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자신이 겪은 환란을 교훈 삼아 미래에 닥칠 외침에 대해 준비하라는 뜻으로 [징비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택당 이식은 인조반정 후 조정에서 벼슬을 한 문인으로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하다.
정통 고문을 통달한 한문사대가로도 알려져 있다. 여진족이 후금(청나라)을 세웠으나 무식한 오랑캐라 하여 척화를 계속 주장하였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어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며 보낸 편지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하고 중국의 마지막 나라가 된다. 그는 명나라와의 의리에도 고지식함을 보인다. 책은 언제나 손에서 놓지 말라고 하며 독서에 대해 크게 강조하고 있는 편지들이 다반사다. 전(戰) 후 먹고 사는 것이 힘들게 되어 거름을 쓰고 재를 만드는 방법까지 가르쳐 준다. 당시 벼슬을 하고 있는 선비들도 먹고 살기 힘든 것은 매한가지 였나 보다.
서계 박세당은 사문난적(유교의 도리를 해치는자)로 몰려 관직에서 물러나 짧은 인생을 산 문인이다. 자신은 새로운 학문으로 노론과 대치하는 상황에 있었다. 아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삶을 말리려 했는지 말조심하라는 말을 편지로 신신당부하며 적어 보낸다. 자식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을 심히 걱정하며 쓴 편지들 많다. 아들 둘을 먼저 저승으로 보낸 후 손자를 얻어 ‘다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마지막 편지에는 슬픈 말년의 아버지 모습에 따뜻한 눈물이 젖어 들기도 한다.
순암 안정복은 이익의 문하에 들어 실학자가 되었다. 그는 천주교 세례를 받는 등 서학은 물론 역사, 주역까지 넓게 익힌 인물이다. 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가계에 큰 도움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편지글에도 실학자의 면모를 이곳저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행실과 공부를 일치하고 친구 사귀는 법까지 속속들이 가르친다. 여자도 글 공부를 하라는 편지는 그때 당시에는 다른 선비에게는 보기 드문 부분이다. 자신도 힘든 상황에서 공부하고 있기에 아우, 아들에게도 나이 들어도 학업을 놓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순암은 자식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게 되었다. 살아있는 동안 아들에게 칭찬 한마디 변변히 못해 후회했다고 한다.
표암 강세황의 편지글은 예술인의 끼가 있다. 자신의 제사에 술을 올리지 말라 당부하면서도 자신은 놋쇠로 술단지를 만들어 보낸 것이 재미있다. 손재주가 있어 구리화의 제조법까지 일러주니 화가이자 발명가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자식이 귀찮게 질문함에 스스로 찾아 공부하라고 일컫는 것은 다른 편지를 글과 느낌이 다르다. 친절하기는 커녕 오히려 면박을 준다. 자신 또한 일일이 태생지를 모르니 알아서 찾아보라고 하는 모습에서 아무리 귀여운 자식이래도 귀찮을 때가 있는 모양이다.
연암 박지원은 그 유명한 <열하일기>를 쓴 저자이다. 청나라를 여행하고 온 본격 여행서로 현대에도 흥미로워 한글로 번역하여 쓴 책들이 널려 있다. 편지는 한글로 변역된 글이라 연암의 글냄새를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정민 교수의 변역이 볼만하다. 읽으면서도 가끔 미소를 머금을 정도로 흥미롭게 씌여졌다. 특히나 손자에 대한 할아버지의 자상한 모습과 보고싶어하는 마음을 한 편지에서는 잘 표현하였다. 어떤 편지를 읽을 때는 연암이 미식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담그는 일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직접 장을 담가 보내는 것을 보면 현대에 태었났다면 그는 호텔의 최고급 요리사가 되었을 성 싶다. 이런저런 주변 이야기도 많이 늘어놓은 것을 보면 자상한 아버지로 비쳐진다. 손자 이야기가 끝났다 싶으면 다시 손자가 보고 싶다는 편지가 있다. 마지막으로 먹고 사는 일과 장 담그는 글로 연암의 편지는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초정 박제가 신유사옥(남인과 천주교도를 탄압한 사건)으로 유배 중 쓴 편지이다.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세워보려 하나 편지 속에는 궁색하게 살아가는 모양새가 그대로 투영되었다. 부족한 것을 아들에게 부탁하며 보내달라는 편지는 그를 더욱 애처롭게 만든다. 세월은 흘러 손자 본 소식에 기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석방되었다는 소식도 희망으로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석방할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모습도 장을 읽을 때 안타깝기만 하다. 편지 내용만으로 본다면 다른 아버지의 편지에 비해 나약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공부하라는 말은 편지 끝에 항상 붙어 있다. 적어도 아버지의 위신을 조금이라도 세워보려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박제가의 궁색한 모습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추사 김정희는 너무나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의 서예가이자 문인이다. 4명의 왕권교체 시기를 겪으며 고난의 유배생활을 두 차례나 했다. 유복하고 권세 있는 가문이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여러 차례 유배생활을 겪으면서 고단한 삶을 지속한다. 편지는 제주도 유배 때의 글이다. 양자로 들인 큰 아들 상무에 대한 애정이 조금 냉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버지로써의 가업에 대한 교육은 놓치지 않았다. 유배 중 한스러움과 집안의 여러 우환이 겹치면서 답답한 마음을 편지로 적어 보내기도 한다.
글 읽는 아들을 상상하며 마음을 달래보기도 하지만 나이 들어 몸이 쇠약해진 자신을 보며 한탄한다. 편지글 말미에는 자식 아끼는 마음으로 이내 공부하라는 당부로 종결한다. 아들이 난(蘭)치는 법을 배우고자 한지를 보내니 아버지의 당당함과 가르침에 힘이 난다. 연이어 편지글을 보내 서법에 대해 일설을 풀어 놓는다.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가르침을 서화 배우고자 하는 뜻에 덧붙안 것이다. 서법 가르침에 인문적 교양과 선비의 맑은 운치까지 내세워 당대 최대의 서예가 임을 확인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는 9년간 제주도 유배와 2년간 북청 유배되었다. 유배생활을 마친 후 과천의 아버지 묘 옆에서 학업에 정진하다 생을 마친다. 그 역시 돌아가신 아버지의 곁을 지키며 남은 생을 자식으로 보낸 것이다. 훗날 아들도 그것을 본보기가 삼았을 것이다.
정민교수의 친필 싸인본과 함께한 아버지의 편지는 조선 중기에서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한번 훑고 지나간 듯 하다. 어려운 한문 고전을 풀어 쓴 딱딱한 한글이 서서히 과거 조선의 따뜻한 선비 아버지로 변모하여 아득한 향수로 다가가게 하는 책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는 나라에 충성한 선비들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그 오랜기간을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왕을 둘러싼 잦은 당쟁 뿐만 아니라 외세 침략으로 나라가 항상 어지러운 형국을 벗어나지 못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인륜을 벗어난 아버지와 자식의 사이란 생각하기 힘들다. 이 책은 그 속 깊은 뜻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현재에도 우리 아버지들은 자식을 바라볼 때 풍랑위의 놓인 가랑잎 보듯한다. 뿐만 아니라 근심이 깊음에도 쉽게 내색하지 않는다. 기쁨도 은근한 꾸지람으로 대신하며 손자 재롱 떠는 낙에 보일 듯 말듯한 미소로 마음을 드러내 표현하신다.
인간사가 사람과 사람들이 옹기종기 깔고 앉은 멍석 같아 그 넓이가 가끔 모자랄 때가 있다. 요즘처럼 어려운 경제상황엔 아버지가 멍석밖으로 밀러 찬바닥에 앉을 수도 있다. 자식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잘 못 본다.
<아버지의 편지> 요즘 서점판에 보기 드믄 책이지 싶다.
위 선비들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며 읽는다면 그 재미가 더욱 솔솔하다. 이 참에 조선의 역사도 한번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어떨까 생각해 본다. 택당 이식이 병자호란을 겪을 당시의 위급함이며 청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와 기행문을 쓴 박지원 등 시대적 아이러니가 역사속 인물로 더욱 빠져들게 한다.
아침에 일어나 아들 녀석과 밥을 먹다 꾸지람 몇 마디를 던질 때가 있다.
초등생 5학년 아들 왈, "저 지금 사춘기예요"
목에 힘을 주어 짜증을 낸다.
그래도 일하다 자식놈을 생각하면 입가에 작은 미소가 생기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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