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에는 영웅뿐만 아니라 인간 군상이 즐비합니다.
역사란 곧 인간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 없는 역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진승상세가에는 조용히 한나라를 여후의 외척정치에서 온전히 한문제에게 왕권을 돌려주는 역할을 한 인물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인물이 바로 진평입니다.
진평의 성장과정에서 그를 지켜봐주고 돌봐준 친형 진백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마천은 이 부분을 진승상세가의 앞부분에 위치시켜 크게될 인물이 되기까지의 복선을 제공합니다. 중국역사에서 한문제는 한나라의 성장과 안정, 기틀을 마련한 중요한 인물로 받아들여 집니다. 이를 복권시킨 중요인물이 바로 진평입니다.
유방이 죽은 뒤 그의 부인인 여후가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유방이 항우와 전쟁을 치르면서 온갖 고난속에 가족을 꾸린 여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 한나라를 세운 후 여후는 자신에게 직챙을 요구하기까지 하죠. 그러나 그녀의 아들이 효혜제가 즉위하게 되면서 한나라는 실질적인 여후의 외척이 모든 정치실권을 가지게 됩니다. 효혜제는 몸이 허약하여 즉위 7년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여후는 명실상부한 한나라의 여황제로 볼 수 있었습니다.
진평은 큰 봉록을 받아 한을 위해 일한 일꾼으로 여후의 그런 외척들의 눌림에도 굳굳이 자신의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여후 또한 진평의 성실함에 신뢰하고 크고작은 일을 많이 맡기게 되었습니다. 여후가 외척을 통한 통치를 했다고해서 한나라의 서민들이 어렵고 고통스럽게 산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마천은 여후의 집권 시대를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고 죄인도 드물었다. 백성들은 농사에 힘을 쓰니 먹고 입는 것이 갈수록 풍족해졌다." 오랜 전쟁이 끝난 뒤이기도 했지만 그 넓은 중국을 오롯이 다스리지 않았다면 이런 평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후가 세상을 떠나기전(기원전 180년) 오빠의 아들을 여산을 상국에 임명하여 유씨 세력(유방의 친족)과 반대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지만 15년을 기다려온 진평은 여후가 세상을 떠난 후 주발과 함께 일격에 외척정치를 뿌리뽑았습니다.
진평은 주변 제상으로 부터 "변절자"라는 말을 들어가며 여후의 명령을 따랐으며, 유방의 작은아들 항이 즉위된 후 주발에게 승상자리를 양보하게 됩니다. 주발이 자진 사임을 하면서 진평은 승상자리를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진평의 철저한 자기관리와 주변을 챙기는 습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평은 항상 유씨의 왕위 복귀를 위해 무던히 희망했고, 이를 감추고 여후의 밑에서 숨죽이고 오랜세월을 따랐던 것입니다.
15년이라는 세월을 참고 기다리리며 결정적인 순간에는 단번에 자신의 소신을 보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진평이 노자의 학문을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약하게 만들려면 먼저 강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무엇인가를 없애려면 반드시 일으켜야 한다" 라는 말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기다림...
어느 시대건 급하게 서두르다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는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진평을 통해 절실히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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